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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장미 - 이화은
오피니언 투고·기고

[마음이 머무는 詩] 줄장미 - 이화은

줄장미

이화은

입술이 새빨간 여자는 다 첩인 줄 알았다

 손톱이 긴 여자는 다 첩인 줄 알았다

 뾰족구두를 신은 여자는 다 첩인 줄 알았다

 녹슨 시간의 철조망을 아슬아슬 건너고 있는

 아버지의 무수한 여자들

[시평]

지금은 다르지만, 우리가 어린 시절이었던, 6.25 전쟁이 막 끝난 직후의 풍경은 많이 달랐다. 시골은 말할 것도 없었고, 서울에서도 동네에 빨간 루주를 바른 여성이 나타나면 모두 수군거렸다. 어디 루주를 바른 것뿐이었겠는가, 뾰족구두만을 신고 돌아다녀도 그렇고, 더더구나 손톱을 기른 모습은 기상천외의 일인 양 생각을 했었다. 그런 여자는 평범한 여염집 아낙이나, 여염집 딸이 아니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입술이 새빨간 여자나, 손톱이 긴 여자나, 뾰족구두를 신은 여자는 다 첩이거나, 그런 유의 여자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어쩌면 그런 여인들이 시대를 앞서가던, 그래서 다른 여성들이 용기가 없어 엄두도 못 내던 자신에의 모습을 스스로 드러내던 선구적인 여성이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또 자신을 치장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닌 존재이니까 말이다.

오뉴월 담장 위 녹이 슨 철조망을 붙잡고 피어 있는 붉은 장미들을 바라보며, 그 옛날, 우리의 어린 시절 용기 있게 자신의 아름다움을 과시하던, 입술이 빨간, 그래서 폐쇄적인 인식의 세상으로부터 수군거림을 당하던 그 여인들을 생각한다. 세상의 이목을 견디며, 그 여인들 녹이 슨 오래된 시간의 철조망에 매달려 아슬아슬 시대를 건너오고 있음을 본다. 그 누군가의, 아니 우리 아버지들의 여인으로 살아야만 했던 그 여인들. 그 여인들의 처연한 모습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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