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nu
‘우리 자원으로 짓자’ 추진력·뚝심으로 소양강댐 건설신화 쓰다
기획 경제·산업·유통 기획

[현대이야기<9>] ‘우리 자원으로 짓자’ 추진력·뚝심으로 소양강댐 건설신화 쓰다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한국 산업 근대화의 주역’ ‘세기의 도전자’ ‘위기의 승부사’ 등 다양한 수식어가 방증하듯 현대경제사와 궤를 같이한 한국의 대표 기업가다. 아산이 일군 현대그룹은 자동차와 조선, 건설, 유통, 자재, 금융 등 주요 산업을 아우르는 글로벌 기업들로 성장해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으로 한국 사회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90년대 정몽헌 당시 현대전자 대표이사가 직접 스카우트해 현대전자에도 몸 담았던 박광수 칼럼니스트가 올해 75주년을 맞은 현대그룹을 파헤쳐본다.

image
박광수 한국과학기술원 자문위원은 학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삼성전자와 LG전자, 현대전자 등에서 40년간 근무했다. 연구개발·생산기술·기획·품질관리·영업·구매 관련 분야를 망라한 것은 물론 영어와 일어에 능통해 미국 일본 등 해외주재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기업경영 컨설턴트, 기업초빙강의 전문가와 신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천지일보 2022.07.07
image
소양강댐.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9> 아산 정주영 회장과 소양강댐

박정희, 댐 건설 경제발전 초석 인식

소양강댐 건설에 4122만 달러 투입

日공영, 콘크리트 중력댐 건설 제안

 

鄭회장, 소양강 주변 일주일간 관찰

콘크리트에서 사력식으로 변경 주장

공사비 절감하고 공사기간 단축시켜

댐에 대한 역사를 살펴보면 세계 최초의 댐 건설은 기원전 2900년 전 이집트 나일강에서 높이 l5m, 길이 100m로 만들어진 석조댐으로 알려지며, 현재까지 사용 중인 가장 오래된 댐은 기원전 1300년경 시리아에 건설된 사력댐이다.

동양에서는 중국 은나라 시절 쓰찬성에 기원전 3세기경 댐이 만들어져서 당시 시대상인 농경사회에 물을 적절하게 이용한 농사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전해진다. 왜냐하면 쓰찬성 산에 눈이 녹으면서 녹은 물이 홍수를 일으켜 그 홍수를 예방하기 위해 설계됐다고 한다.

유럽지역은 1594년 스페인 알라칸데 디버댐이 최초이며, 19세기 이후 전 세계 국가는 농업과 공업용수에 필요한 다목적댐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사례로서 1850년대 스코틀랜드 토목기술자 월리엄 J.M 랭컨의 기술로 토목공학의 방향이 기본기술이 돼 이후 100년간 뉴턴, 라이프니츠, 후크와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의 발전으로부터 축적된 지식과 기술이 현대식 댐 건설의 토대가 됐다.

image
중국 후베이성 싼샤댐에서 물이 방류되고 있는 모습. (출처: 뉴시스)

◆세계 최대 규모 수력발전 댐 中 ‘싼샤댐’

지금은 북한지역이지만 1941년 압록강 본류에 일본인들이 건설한 중력식 콘크리트 댐인 수풍댐은 높이 106m, 총저수량 112억t, 발전출력 70만㎾로 이는 댐 건설기술과 규모에서 당시에는 세계적인 수준의 댐으로 기록됐다.

미국은 남서부 콜로라도강 유역의 종합개발을 위해 건설된 높이 221m, 기저부 너비 200m, 저수량 320억t의 아치형 콘크리트 중력댐이 유명하다. 이 댐은 1936년에 완공됐으며, ‘볼더댐’이라 불리어지다 미국 제 31대 대통령 후버를 기념해서 ‘후버댐’으로 변경됐다.

중국 동부와 서부를 연결시키는 양쯔강 지역에 건설된 세계 최대 규모의 수력발전댐인 싼샤댐은 1994년 착공돼 2009년에 완공시킨 높이 185m, 길이 2335m, 넓이 135m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댐은 김제 벽골제로 알려졌으며, 백제 11대 비류왕 27년(서기 330년)에 4.3m의 높이에 둑의 길이 1800보(3240m)로 당시 사회상으로 볼 때 이는 대규모의 토목공사였다. 수준 측량의 정밀도가 상당한 수준으로 처음 축조됐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이런 기술은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둑 건축의 주춧돌 역할을 한 것으로 필자는 판단되며, 일본 나라현에 가면 ‘백제지’라는 호칭을 아직도 사용 중이다. 

이 둑은 통일신라 원성왕 6년(서기 790년) 중축 이후 11세기 초 고려 현종, 12세기 인종, 15세기 초 조선 태종을 포함해 4차례 개축했으며, 세종 2년(서기 1420년)에 홍수로 무너졌다. 1925년 동진수리조합이 농지관개용 간선수로를 설치하는 과정에 일부 훼손됐으나, 1975년에 재복원해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현재는 둑의 길이는 2.53㎞로 확인됐고, 둑의 길이가 북으로 김제 장화동에서 남으로 월승리 사이 3.8㎞에 달해 이곳이 수문지임을 증명하는 석주가 아직도 남아있다.

image
1972년 소양강댐 담수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출처: 국가기록원)

◆‘육사 출신’ 박정희, 댐 관련 해박한 지식 보유

소양강댐 건설을 지시한 박정희 대통령은 육군사관학교의 포병장교 출신으로 댐 건설의 중요성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해박한 지식을 보유했다.

1960년대 한국은 미세하지만 경공업의 걸음마를 시작한 시대로 아직은 농경 중심의 사회로서 벼농사가 풍작이냐 흉작이냐가 우리 경제에 큰 이슈가 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한국지형상 여름철 장마가 내리면 서울지역인 뚝섬, 잠원동, 압구정동, 잠실지역은 해마다 홍수로 인해 배수가 안 되고 주변지역의 주택들이 50% 이상 물에 잠기는 피해가 반복됐다. 오죽하면 전국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 학생들이 수재민들을 돕자고 수재민 구호기금을 십시일반 작은 쌈짓돈을 걷어서 국가에 헌납했으며, 공무원과 직업군인들을 포함 일반회사원들도 급여에서 자발적으로 성금을 걷어서 내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행되면서 본격적인 국토개발이 시작됐고, 이와 더불어 수자원개발이 국토개발의 중심사업으로 추진됐다. 반복되는 수해와 한해의 악순환을 막고 수력발전을 통한 전기 공급, 생활용수, 공업용수, 양어, 하천유지용수, 관광업, 수상운송 등 수자원을 다양하게 활용하기 위한 다목적댐 건설의 중요성이 경제개발의 초석을 다지는 사업이라고 박정희 대통령은 판단했다. 

image
현장 지휘하는 정주영 회장. (아산정주영닷컴)

◆鄭회장, 건설부에 설계변경 강력 제안

섬진강댐과 남강댐이 1965년과 1970년에 각각 완공됐다. 이후 1972년 10월 높이 123m, 만수위 198m, 제방길이 530m, 총 가용 저수량 29억t에 이르는 당시 동양 최대의 다목적댐이며, 현재도 세계 5위권 사력댐 소양강댐을 우리의 기술로 현대건설이 단독으로 건설했다. 수도권지역의 홍수방지 및 12억t의 수돗물공급과 연간 353GWh의 전기를 생산해 수도권지역을 포함 농촌지역에 전기를 원활하게 공급하는 일거양득 효과를 주게 됐다.

1965년 6월 22일 한일국교 정상화 협정체결로 일본으로부터 3억 달러의 무상자금과 2억 달러의 차관을 받은 박정희 정권은 이 자금을 이용해 춘천시 북쪽에 위치한 곳에 소양강댐을 건축하라고 지시했다.

2억 달러의 차관 중 20.6%인 4122만 달러가 소양강댐 건설에 투입됐다. 1965년 11월 건설부는 일본 정부가 자금을 내어서 만드는 댐이므로 설계사인 일본공영과 소양강댐 기술조사 및 설계용역을 체결했다. 당시 일본공영은 콘크리트 중력식 122m 높이의 댐이 무난하다고 제안했다. 콘크리트 중력댐은 건설기간 중 돌발 사태에 안전을 기할 수 있고, 댐 완공 전에라도 수력발전을 개시할 가능성이 있으며, 국산 시멘트 사용은 국가 경제에 호경기를 가져다 줄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시공사로 결정된 현대건설의 정주영 회장은 건설 예정인 소양강 주변을 일주일간 치밀하게 살펴본 후 건설부에 사력식이면 총 공사비 203억 규모에서 약 34억원의 공사비를 절감할 수 있으며, 건설 공기도 5년에서 4년으로 1년 단축할 수 있다고 강력하게 설계변경을 제안했다. 또 정 회장은 콘크리트 방식의 중력댐은 한국의 철근(일본에서 100% 수입), 시멘트 등 건설자재 생산능력의 부족과 자재 수송비와 건설기자재, 장비를 일본에서 들여와서 사용함으로서 댐 건설 자금의 상당 부분이 일본으로 재유출되는 등으로 막대한 건설비가 소요될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image
ⓒ소양강댐 항공전경. (제공: 한국수자원공사)

◆鄭회장의 뚝심에 朴대통령 ‘사력식’ 변경 지시

그리고 정 회장은 콘크리트 댐은 적의 폭탄에 공격을 당하면 구조가 파괴되지만, 사력식 댐(모레와 자갈, 흙 등으로 건설)은 그러한 충격에 강하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당시 6.25 전쟁이 발생한 지 10여년 밖에 안 되던 시기이므로 전쟁이 발생되면 이런 위기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이러한 정주영 회장의 강력한 제안은 박정희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여 중력식 댐에서 사력식 댐(현장에 널려 있는 바위, 자갈과 모래 사용으로 건설비 절감 가능)으로 변경해 건설하라고 최종적인 지시를 1968년 8월 중반에 한다.

당시 에피소드로 인기작이던 ‘나바론요새’라는 영화수입 방영에 현대건설은 적극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전쟁 시 폭탄에 약한 콘크리트 방식의 약점을 직·간접적으로 국민들에게 홍보도 했다. 

1967년에 착공에 들어간 소양강댐의 시공사인 현대건설은 정주영 회장의 저돌적인 뚝심으로 무장하고 댐 건설에 매진해 밤에는 횃불과 자동차 라이트를 사용해서 쉴 틈 없이 밤샘공사 끝에 1972년 10월에 공기를 단축하며 완공했다. 건설 완공 시 현장에 도착해 테이프커팅을 한 박정희 대통령은 대만족을 하면서 현대건설의 근로자들과 현장책임자들의 노고에 고마움을 표시했다고 한다.

소양강댐은 가능한 최대한의 물을 댐에 가둬 놓아 홍수 피해를 최대한으로 줄일 수 있었으며, 홍수 시 부득이하게 물을 하류로 흘려보내는 시설인 여수로에는 총 9개의 수문이 장착됐다.

또한 댐 건설로 인해 춘천시 북산면과 동면, 양구군 양구읍과 남면, 인제군 남면일대의 4600여 세대가 고향을 떠나 타지역으로 이주해 살게 됐고, 약 2700ha의 논과 밭이 수몰되기도 했다. 끝으로 소양강댐은 매우 중요한 국가중요시설로서 웬만한 폭탄과 미사일의 공격에도 방호가 가능하고 ‘가급’ 국가중요시설이라 무기고와 경비인력들도 배치돼 있다. 육군 제2군단에서도 소양강댐에 대한 방호훈련도 틈틈이 실시하고 있다.

(정리 = 유영선)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 카카오톡 채널: 천지일보
  • 전화: 1644-7533
  • 이메일: newscj@newscj.com
저작권자 © 천지일보 - 새 시대 희망언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지면구독신청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