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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정주영의 합작품 ‘경부고속도로’ 2년 5개월 만에 ‘초고속’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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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이야기<8>] 박정희·정주영의 합작품 ‘경부고속도로’ 2년 5개월 만에 ‘초고속’ 건설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한국 산업 근대화의 주역’ ‘세기의 도전자’ ‘위기의 승부사’ 등 다양한 수식어가 방증하듯 현대경제사와 궤를 같이한 한국의 대표 기업가다. 아산이 일군 현대그룹은 자동차와 조선, 건설, 유통, 자재, 금융 등 주요 산업을 아우르는 글로벌 기업들로 성장해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으로 한국 사회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90년대 정몽헌 당시 현대전자 대표이사가 직접 스카우트해 현대전자에도 몸 담았던 박광수 칼럼니스트가 올해 75주년을 맞은 현대그룹을 파헤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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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수 한국과학기술원 자문위원은 학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삼성전자와 LG전자, 현대전자 등에서 40년간 근무했다. 연구개발·생산기술·기획·품질관리·영업·구매 관련 분야를 망라한 것은 물론 영어와 일어에 능통해 미국 일본 등 해외주재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기업경영 컨설턴트, 기업초빙강의 전문가와 신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천지일보 2022.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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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에서 박정희 대통령 내외와 함께한 아산 정주영 회장. (출처: 아산정주영닷컴) ⓒ천지일보 2022.07.04

 

박정희 대통령, 1961년 美 방문시

미국 전역에 놓인 고속도로에 놀라

대한민국 고속도로 건설의 ‘시발점’ 

 

朴대통령, 정 회장 불러 직접 지시

“고속도로 건설 가능한 유일한 회사”

공사로 총 77명의 고귀한 목숨 잃어

한반도의 대동맥과 핏줄(젖줄)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고속도로는 고인이 된 박정희 대통령이 5.16 군사정변 후 정권을 잡고 1961년 11월 11일 미국의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이 성사돼 공화당 당의장 자격신분으로 미국을 방문하면서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 전역에 놓인 고속도로를 보고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언젠가 대한민국도 경제발전을 하면 미국처럼 산업화의 기본 인프라인 고속도로를 반드시 대한민국 전역에 건설하겠다고 판단을 한 게 시발점이었다. 그 후 1963년 10월 15일 합법적인 선거로 3공화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박정희 대통령은 서독 정부의 국빈자격으로 초청을 받아서 1964년 12월 6일 국가원수로서 최초로 9박 10일간 서독 방문길에 올랐다. 그 시점에 대한민국은 대통령 전용비행기가 없었다. 서독 정부는 우리나라에 전세기(루프트한자 소속)를 보내줬고, 박 대통령은 그것을 타고 어렵게 서독에 갈 수 있었다. 

◆서독 아우토반 보고 고속도로 구상 착수

당시 서독으로부터 차관(4000만 달러)을 빌리러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할 정도로 대한민국 경제는 방직공장 정도만 가동하던 비참하기 짝이 없던 시절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절박한 마음으로 하인리치 뤼프케 서독 대통령을 만나러 갔다.

대한민국은 당시 산업화가 전무한 상황이어서 외화벌이용으로 꽃다운 20대 초반의 미혼 간호사를 모집해 서독 병원으로 파견했고, 직업이 없어서 백수로 지내는 대학을 졸업한 우수 청년들을 서독 탄광의 광부로 파견해 외화를 벌었다. 그래도 부족한 외화는 월남전을 통해 벌어들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월남에서 전쟁이 발생하자 미국의 요청으로 군대(맹호, 백마, 청룡, 비들기부대 등)를 1965년 월남전선으로 파견했다. 극단적으로 보면 젊은이들을 총알받이로 내세우고, 미국 달러로 급여를 받아 한국으로 송금해 외화를 벌어들인 것이다. 

서독 방문 당시 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한 독일이 빠르게 경제를 발전시키고 선진국 반열에 오른 것을 서구에서는 ‘라인강의 기적’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은 독일의 고속도로인 아우토반을 승용차로 달리면서 다시 한 번 고속도로의 중요성을 깨닫게 됐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독일 본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수차례 반복하면서 대한민국 경제부흥의 시발점인 서울에서 대전, 대구, 울산을 거쳐서 부산에 이르는 고속도로 지도를 직접 그린 일화도 유명한 전설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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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 현장 시찰하는 정주영 회장. (출처: 아산정주영닷컴) ⓒ천지일보 2022.07.04

◆독일 다녀온 뒤 경부고속도로 건설 발표

독일 정부의 직·간접적인 경제 부흥에 대한 아이디어를 획득한 박정희 대통령은 대한민국도 독일처럼 ‘한강의 기적’을 이루려면 중화학공업, 조선산업, 자동차산업, 전자산업의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구미지역에 전자단지, 울산지역에 중화학(철강산업 포함)과 자동차 단지를 구축하려면 사회간접자본을 확대시켜 대한민국을 수출형 공업중심으로 산업구조를 개편해야 한다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이는 당시 서울에서 부산까지 하루 꼬박 걸리는 물류시스템을 반나절로 줄이고 시스템을 획기적으로 개편하는데 주요 역할을 하게 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서독 방문 시 파견 광부와 간호사들을 만나서 눈물을 흘리면서 반드시 한국의 경제를 개발시키고 대한민국도 독일처럼 잘사는 국가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약속대로 박 대통령은 대한민국 현대화의 산업기반을 구축하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시행으로 혁혁한 성과를 냈다. 

방문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광부와 간호사들에게 한 명연설이 아직도 회자된다. 그는 연설에서 “여러분 만리타향에서 이렇게 상봉하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조국 대한민국을 떠나 이역만리 남의 나라 서독에서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서독 정부의 초청으로 여러 나라 사람들이 서독에 와서 일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한국 사람들이 제일 잘하고 있다고 칭찬을 받고 있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라고 연설했다. 

그는 연설 말미에 “여러분 난 지금도 몹시 부끄럽고 가슴이 아픕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무엇을 했나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을 합니다. 나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우리 후손만큼은 결코 이렇게 타국에 팔려 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반드시 이 약속을 지키겠습니다”라고 호소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온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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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식. (출처: 아산정주영닷컴) ⓒ천지일보 2022.07.04

◆朴대통령, 정 회장에 경부고속도로 건설 지시

하지만 당시 일반 국민들과 야당 정치인들은 자동차도 몇 대 안되는 국가에서 쓸데없이 예산을 낭비한다며 고속도로 건설을 적극 반대했다. 또 그 돈으로 국민들 생활복지 향상 및 공장을 건설하는데 사용하라고 역설했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먼 미래를 내다본 안목으로 고속도로 건설을 강행했다.

당시 1966년 기준으로 대한민국 1인당 국민 총생산(GNP)은 142 USD, 수출 3억 2000만 USD로 북한의 절반 수준으로 고속도로보다는 벼농사 기술 개발이 더 시급성을 느끼던 시절이었기에 야당의 반대가 일리는 있었던 시점이었다.

그리고 전쟁에서 폐허가 된 남한지역의 복구(한강대교 복구, 고령대교 복구, 소양강댐 건설 등)에 전력을 다한 현대건설의 정주영 회장을 직접 청와대로 불렀다. 박 대통령은 정 회장에 “임자, 당신만이 태국의 고속도로 건설을 성공리에 완공했으니, 그 경험을 살려 대한민국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해달라”라며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 건설을 지시했다. 

항상 긍정적인 마인드로 현대건설을 경영하던 정주영 회장은 주변의 지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주축회사로 참여했다. 

1968년 2월 1일 한남동에서 첫 삽을 뜨면서 착공에 들어간 경부고속도로는 서울-수원 간을 1차로 완공했다. 이때 수원시 중동에서 출발해 한남대교를 건너서 서울 중심지인 백병원 부근 저동까지 운행하는 유신고속버스가 처음으로 운행을 시작했다. 당시 초등학생이고 수원에서 살던 필자도 신기해서 수차례 친구 누이가 안내원으로 고속버스에서 근무하던 시절 무료로 버스를 승차하고 처음으로 서울을 왕복으로 오간 기억이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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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 개통 당시의 모습. (출처: 아산정주영닷컴) ⓒ천지일보 2022.07.04

◆경부고속도로 건설 최대 난공사 ‘당재터널’

하지만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쉽게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부족한 건축자재는 현재 남태령고개 부근에 있던 야산에서 돌산을 캐서 나온 자재를 사용했고, 시멘트는 현대시멘트회사에서 생산한 시멘트를 저렴하게 이용하기도 하면서 지금처럼 콘크리트 방식이 아닌 아스팔트 방식으로 건설했다. 공사기간 중 정주영 회장은 현장 인부들과 같이 야외 숙소에서 숙식하면서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당시 사원으로 근무 중이던 이명박 전 대통령이 두뇌가 뛰어나고 부지런하게 일하는 모습을 본 정주영 회장은 건설자재 총괄관리 및 현대건설의 중요 임원으로 발탁했다. 이에 이명박 대통령은 대한민국 기업 역사상 최소 나이에 현대건설의 회장까지 초고속으로 승진하는 샐러리맨의 신화를 만들어냈다.

이런 현대건설이 최초의 위기를 겪게 되는데 대전에서 경상북도 추풍령 공사구간 중 부득이하게 터널 하나를 뚫어야 하는데 당시 터널공사 경험이 없던 현대건설은 양방향에서 동시에 건설하면서 중간에 만나 개통하는 방식으로 시공을 하게 됐다. 

하지만 공사가 끝나가는 다른 구간과는 달리 당재터널(현재 옥천터널)은 공사 진행이 더뎠다. 대전과 대구를 연결하려면 반드시 뚫어야 하는 곳이었다. 당재터널 공사 중 낙반 사고로 3명 순직할 정도로 공포의 구간이었다. 이들을 포함해 총 77명의 고귀한 목숨이 경부고속도로 건설공사 과정에서 희생됐다.  

당재터널의 경우 갑자기 수맥이 터져 나와서 무너지는 등 생명의 위협을 느낀 현장 근로자들은 일터를 도망치거나, 퇴직하는 경우가 많아서 공사를 더 이상 추진할 수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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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 현장 시찰하는 정주영 회장. (출처: 아산정주영닷컴)ⓒ천지일보 2022.07.04

◆세계서 가장 저비용으로 최단기간에 건설

현장의 보고를 들은 정주영 회장은 특유의 앞만 보고 가는 돌격 대장처럼 직접 착암기를 들고 당재터널 공사 현장 속으로 들어가서 생명위험을 감지하면서도 터널안의 단단한 돌덩어리 등을 제거해 나갔다. 현대건설 오너인 정 회장이 직접 나서자 작업자들은 위험하다고 공사를 피하는 건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과거 이승만 대통령이 강조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메시지를 마음에 새기면서 똘똘 뭉쳐 공사를 강행했다. 그 결과 당재터널이 뚫렸고,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최대 위기를 넘겼다. 

이런 과정을 통해 1970년 7월 7일 전장 429km의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서울-부산 간을 4시간 30분 만에 갈 수 있게 되면서 전국이 일일생활권으로 가능해졌다.

또한 경부고속도로 공사비는 429억 7300만원으로 세계에서 가장 싼 비용과 최단기간(2년 5개월)에 고속도로를 건설했으며, 1967년 기준으로 보면 대한민국 국가예산의 23.6%에 달하는 자금이었다. 1966년 말 기준으로 국도 및 지방도로 포장률은 5.6%, 자동차 등록대수는 갑부들의 상징으로 고작 5만대 정도로 알려졌다.

정주영 회장의 현대건설은 경부간 고속도로 건설을 통해 확보된 기술력과 경험을 토대로 중동지역 국가들의 건설에 앞장섰다. 한때 해외에서 벌어들인 오일 달러의 절반을 현대에서 벌어오는 상황이 발생하는 등 대한민국 산업 현대화에 큰 기여를 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끝으로 추풍령에 세워진 준공기념탑에는 “조국 근대화의 길이며, 국토통일의 길”이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휘호가 새겨져 동판에 새겨져 있다. 또한 고속도로 건설 과정에서 부득이한 사고로 고인이 된 77명의 근로자들의 희생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되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국민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정리 = 유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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